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.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,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.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우고 차베스 (문단 편집) === 대통령 이전 === 바레나스 주 사바네타에서 태어났다. 학창시절에는 [[메이저 리그 베이스볼]] [[선수]]를 꿈꾸던 야빠소년이였으나 마침 [[육군]]에 야구선수 양성 프로그램이 있다는 소리를 듣고 [[야구]]선수가 되려고 [[육군사관학교]]에 진학했는데 거기서 진로를 바꿔 직업군인이 되었다. 결과적으로 야구선수가 되는데 실패했지만 [[야빠]]인건 틀림없어서 육군 [[장교]]로 재직하고 있을때 아마추어 야구대회에 참여했고, 대통령 재임시에 야구 대표팀에 대대적인 지원을 보냈다(다만 2009년 WBC를 제외하면 생각보다 성적은 그리 신통치 못했다. 그리고 그 WBC도 준결승에서 [[2009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#s-5.3.1|당시의 김인식호]]에게 깔끔하게 개박살나고 --그렇게 차베스가 싫어하던-- 미국과 함께 공동 3위에 그쳤다.). 2005년 월드시리즈에서도 시카고 화이트 삭스(당시 화이트 삭스 감독이 베네수엘라 출신의 아지 기옌)가 우승에 성공하자 엄청 좋아하기도 했다. 육군 장교가 된 이후에 [[시몬 볼리바르]]에 매력을 느껴 볼리바르 대학 정치학과에 재직하기도 했으며, 때마침 형인 아단 차베스가 좌파 성향이었다는 점도 한 몫하여 이 때부터 좌파사상에 호기심을 가지기 시작했다. 그 이후에 베네수엘라의 빈부격차와 군 내부의 부패 문제를 보고 여러 좌파 지식인과의 만남을 가지면서 "볼리바르-200"이라는 군내 정치단체를 만들고 '볼리바르 사상'을 정립하게 되었다. 그 후의 차베스는 군사학교에서 강사로 재직하면서 당시 정부에 대한 비판[* 이 시기엔 석유값 하락과 외채위기와 함께 베네수엘라의 경제가 점차 막장화되어갔는데, 당시 베네수엘라 정부는 변변한 대책을 내세우지 못했다.]과 정열적인 강의법으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다. 그러면서 콜롬비아 국경지대로 전출되면서 민-군 협력증진 프로그램에 참여했고, 1988년에 승진하여 대통령궁에서 국가안전보장회의의 보좌관으로 근무하게 되었다.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빨간물(?)이 좀 들긴 했어도 딱히 쿠데타를 일으키려 한다거나하는 조짐은 없었다. 한편 이 시기에 페레스 前 대통령이 경제가 계속 하향세를 타서 여당인 민주행동당이 불리했던 상황에도 그 전에 대통령에 재직(1974-1979년)했던 경험과 뛰어난 선거전략,[* [[https://www.youtube.com/watch?v=LJYfKxnRDAI]] 당시 민주행동당 후보와 기독사회당 후보의 선거광고를 비교해보면 ~~물론 지금보면 둘다 촌스럽긴 하지만~~ 딱 봐도 민주행동당 페레스 후보의 광고가 훨씬 더 났다는걸 알 수 있을 정도(...).] 상대야당인 기독사회당의 자중지란까지 겹치며 과반을 넘기는 득표로 재선에 성공했다. 하지만 그는 경제를 살린다는 명분하에 [[IMF]]의 구제금융을 받아들였고 이 구제금융 조건으로 교통비와 석유값을 보조하는 정책이 전면적으로 중단되어 순식간에 물가가 2배가 오르자 물가폭등에 항의하는 빈민층들이 대대적으로 들고 일어나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수천명이 사망하는 참사가 벌어졌다(일명 카라카소[* 카라카스의 참사. [[마라카낭의 비극|마라카나수]]나 [[미네이랑의 비극|미네이라수]]와 조어 원리가 통한다.]). 그 이후에도 실정이 이어지면서 차베스는 페레스 정권을 뒤엎을 결심을 하게 되고 3년 뒤인 [[1992년]] 페레스 정권[* 참고로 1974년-1979년에 대통령에 재임하면서 오일쇼크하에서 베네수엘라 경제가 크게 성장시키는 성과를 냈고, 1988년 대통령 선거에서 경제위기 상황속에서 재선에 성공했으나 재선 직후 신자유주의 정책을 널리 수용하면서 카라카스 봉기가 일어나고 그 이후에도 빈곤율이 높아지는 상황에서 국민들의 불만이 높아지는 상황에서 집권 1기 때의 명성을 '''전부 까먹고''' 결국에 부패혐의로 법원에 의해 탄핵되는 수모를 당했다. 1999년에 베네수엘라를 떠났으며 2010년 미국에서 사망.]의 지지가 크게 떨어지는 상황에서 페레스 대통령과 그 측근들의 부패혐의를 내세워 현역 중령으로 10% 정도의 군 병력을 장악해 [[쿠데타]]를 시도했으나 페레스 충성파 군인들에 의해 진압되어 대차게 실패했다. 하지만 쿠데타가 진압되어 투항하는 조건으로 방송연설을 할 기회를 얻어 자신의 동료들을 처벌하지 말라며 “지금은 목표를 이루지 못했지만 언젠가는 이룰 것이다. 모든 책임은 내가 지겠다"라는 내용의 연설을 해 베네수엘라 국민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고 이후에 2년간 감옥에서 복역하다가 [[라파엘 칼데라]] 정권 때 들어서 사면되었다. 라파엘 칼데라는 출신성분(?)이 보수파이긴 했어도 재선 당시에는 일부 좌파 정파의 지지를 받던 상태였기에 사면이 가능했다. 더군다나 라파엘 칼데라 입장에선 페레스 前 대통령의 부패혐의도 입증되긴 했으니 굳이 차베스를 감옥에 더 가둬놓을 이유가 없긴 했다. 물론 라파엘 칼데라가 IMF 구제금융을 받아들이는 조건으로 신자유주의 정책을 실시하면서 갈라섰지만... 차베스의 쿠데타는 [[베네수엘라]] 정치 체제를 뒤흔들어놓았다. 베네수엘라는 사실 오랜 정치 안정을 누리고 있었다. 빈발하던 쿠데타와 정치적 불안으로 인해 체결된 "푼토 피호 협정" 이후 [[1958년]]부터 양당체제 하의 정권교대가 계속되던 상황이었기 때문이다. 차베스의 쿠데타 기도 당시 푼토 피호 협정은 34년째 되는 해였다.차베스가 주적으로 삼고자 했던 것은 오랜 기간 고착화된 양당제 하 심화된 신자유주의의 모순이였고 자기네들끼리 형성된 카르텔로 돌아가며 정권을 세웠고 98% 나머지 국민들의 생활은 관심이 없었고 자기들만 이익을 챙기게 되는 상황이 계속 발생하면서 결국 쿠데타가 일어나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